감사는 누구나 배우고 훈련할 수 있는 마음의 기술입니다.
감사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깊어지면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감사할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저 모든 것이 감사할 분입니다.
그때는 감사함을 애써 찾으려 하지 않아도
삶의 매순간이 감사함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 일지 이승헌의 붓그림 명상 中
시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서운함과 불만이 가득했지만
자아발견 명상을 하면서 문득 시어머니께 사랑받고 싶었던 마음과
시어머니께 감사함을 표현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는 박금해씨.
그녀가 용기를 내어 시어머니께 감사함을 표현한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박금해씨의 사연을 공개합니다.
미움으로 가득찬 마음의 고통
시어머니와 한 지붕 아래서 산지 10년째...
미운 정 고운 정이 쌓여가고 있었다.
열 번 잘해 주다가 한번만 서운하게 해도
원망하는 마음이 드는게 사람인지라
미운 마음이 훨씬 더 커져가고 있을 때였다.
좁은 집에 광주에서 올라온 시누이와
조카까지 같이 살게 되니 마음이 불편할 때도 많았다.
그때 자아발견 심성수련을 소개받았다.
명상을 통해 진실한 나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것이라고 했다.
마움과 분노가 내 마음을 가득 채워져 고통스러웠기에
내게 꼭 필요한 시간이 될 것 같았다.
고통은 감사함을 모르는데서 온다
1박2일 동안의 시간동안 시어머니가
제일 많이 생각나고 계속 얼굴이 떠올랐다.
힘든 중에도 일찍부터 망가진 무릎을 절룩이며
집안일을 돌보고 계신 어머니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해드리지 못했다.
수련 중 ‘관념 속의 나’와 ‘참나’를 분리하여 통찰하자
마음이 열리고 호흡이 내려가면서
어머니께 감사하는 마음이 부족했던 게 고통의 원인임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으로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되었다.
사랑받고 싶다고 당당히 말햐야 겠다
무엇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였다.
어머니를 친정엄마처럼 여기며 사랑받고 싶었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말이다.
그것이 안 되니 어머니와의 관계가 더욱 힘들어졌다.
결혼 초기만 해도 시어머니와 정말 잘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10년 동안 잘한 게 없었다.
관계가 악화되어 가니 나는 말대답을 하게 되고 그것이 불화로 이어졌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그 관계를 변화시킬 용기가 없었다.
수련에서는 용기를 내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소리 지르기라든지 호흡으로 감정 조절하는 등의 여러 가지 방법을 알려주었다.
장미꽃 한다발을 내밀었다
프로그램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이번 기회에
어머니와 맺힌 감정을 풀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어머니께 드리려고 장미꽃 한 다발을 샀다.
꽃을 내밀며 내 마음을 고백하려고 했다.
상대의 반응에 마음이 위축되다
벨을 눌렀더니 어머니가 아이 하나는 등에 업고 하나는 옆에 세워두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은 화가 나신 듯 했다.
“지금이 몇 신데 이제 들어오냐?”
분위기로 봐서 꽃을 드렸다가는 꽃으로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유리창 밑에 꽃을 가만히 놓아버렸다.
나야 어머니 마음을 풀고자 꽃을 샀지만,
어머니 입장에서는 내가 당신을 놀린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정신없는 것, 너 지금까지 뭐하고 돌아다니다가 이제야 오는 거야?”
다시 용기를 내었다
마음먹은 대로 용기를 내서 어머니를 껴안으려고 했는데
어머니의 잔소리에 그만 몸이 굳어버렸다.
나는 의기소침한 상태로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큰방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이대로 방으로 들어간다면 기회는 다시없을 것 같았다.
그래, 용기를 내는 거야. 지금이 아니면 안 돼!!
나는 다시 용기를 내서 돌아섰다.
그리고는 아직도 현관 앞에 서 있는 시어머니께 다가가 허리를 감싸며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말이 나오지 않아 울먹이기만 하면서 말이다.
“너 술 마셨어? 주정하는 거야?”
“어머니, 술 하나도 안 마셨어요.
어렵게 꺼낸 말...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한테 그동안 못했던 거 진심으로 죄송해요.
어머니 용서하세요. 그리고 정말 감사합니다.”
어머니는 황당했는지 손을 놓으라며 손등을 찰싹 때리기까지 했다.
그래도 나는 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용서하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사랑하고 있어요. 진심이에요.”
그제야 어머니는 가만히 계셨다.
“어머니를 친정엄마처럼 생각하며 잘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10년 동안 그러지 못했어요. 저는 친정 부모님도 안계시고,
시아버님도 안계시고 오직 어머니 밖에 없어요.
이제부터 정말 어머니를 친정 엄마라고 생각하고 잘하고 싶어요.”
내 진심이 전해진 것일까. 어머니는 가만히 울기 시작했다.
서로 부둥켜안고 말없이 계속 흐느끼기만 했다. 남편과 아이들은 영문을 몰라 했다.
남편은 아이들을 챙겨서 방으로 들어가면서
눈빛으로 어머니 방으로 모시고 들어가라는 손짓을 보냈다.
“정말 죄송해요. 어머니 아니었으면 제가 이렇게 직장생활을 할 수도 없는데,
알면서도 표현을 못했어요.”
10년간 오해가 풀리다
“알면 됐다.”
어머니는 그 말만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이대로 끝날 수 없다는 생각에 어머니 방으로 쫓아 들어갔다.
다시 한 번 어머니를 껴안았고 밤새 울면서
처음으로 서로의 속에 있는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그동안 서운했던 말을 따지기도 하고, 가슴에 맺힌 것들을 풀어내면서
서로를 측은지심으로 바라보게 된 것 같다.
시어머니는 당신도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려고 했는데,
내가 당신 속도 모르고 쌩콩하게 굴어서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고 하셨다.
밤새 10년의 오해를 풀었다. 이제야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사랑한다는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시어머니와의 관계를 변화시켜야겠다는 용기가 결국 소망을 이루어주었다.
관계의 변화
다음날 아침, 늦잠을 잤다.
어머니가 깨워서야 일어났는데, 밥 먹고 가라고 상을 차려놓으셨다.
정말 ‘우리 어머니가 달라졌어요,’였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우리 며느리가 달라졌어요.’일 테지만.
그날부터 나는 어머니에게 딸이 되었다. 오죽하면 시누이가 질투할 정도였다.
“어머니, 오늘 비가 오니까 김치전이 당기네요. 우리 전해서 먹을까요?”
그날 이후 나는 시시때때로 전화를 했다.
퇴근 후 집에 가면 김치전의 고소한 냄새가 부엌에 진동하고 있었다.
가장 예쁘게 부쳐진 전을 골라서 예쁜 접시에 가득 담아주셨다.
“하루 종일 애썼다. 어서 많이 먹어라”
시어머니는 정말 친정엄마처럼 이것저것 챙겨 주셨다.
나 역시 친정엄마에게 하듯 사소한 일들을 어머니에게 서슴없이 부탁했다.
“어머니 옷 좀 다려놓아 주세요.”
“빨래 따로 놓아두었으니 삶아 주세요.”
어머니께 부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퇴근하고 돌아와서
수련타임에서 배운 활공(손으로 경락 등을 눌러 기운을 회복하는 기술)을 해드렸다.
어머니는 나의 활공을 좋아하셨다.
아무리 늦어도 활공을 받고 주무시려고 내가 퇴근하고 올 때까지
안주무시고 기다리시곤 했다.
어머니와 잘 통하니 마음이 가볍고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
서로를 인정하다
살면서 가장 힘든 장벽이었던 어머니와 진정한 소통을 하고 나니
다른 일도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에게 욕도 많이 먹고 잔소리도 숱하게 들어서 나름 단련이 되었다.
어떤 민원인의 불평도 어머니의 잔소리보단 나았다.
10년 동안 어떻게 불편하게 지냈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 고부 사이는 급격하게 좋아졌다.
“여자도 돈 버는 재주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충분해~
어떻게 공부도 잘하고 애도 잘 낳고 심성도 좋은데
요리까지 잘 하겠냐? 하느님이 한사람한테만 그렇게 재주를 많이 주면 안 되지잉~
요리는 솜씨 좋은 요리사가 만든 음식을 사서 맛있게 먹어주면
그것으로 되는 것이여~ 그 대신 힘은 좋으니 청소는 니가 담당해라 잉~”
그리고 요리를 잘 못하는 나에게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말씀하시며
늘 내편이 되어 주었다.
아이들은 어머니 손에서 무럭무럭 잘 자라서 나는 업무에만 열중할 수 있었다.
이생에서의 인연이 끝나도...
그런데 7~8년 화목하게 지내던 중 갑자기 건강이 나빠지셨다.
7개월 동안 앓아누우셨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돌아가실 때 신부님 모시고 기도를 해드렸다.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다른 며느리들도 있지만,
교회를 다니고 있어서 제사를 부탁할 수가 없다면서
내게 당신 제사를 부탁하셨다.
“제사를 지내달라고 할 때는 논밭을 준다는데, 너한테 줄 게 없다.
그래도 제사를 지내주겠니?”
어머니는 워낙 베풀기를 좋아해서 가진 것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나는 당연히 그렇겠다고 했다.
자식 된 입장에서 당연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동안 어머니가 우리 집에 베푼 것을 생각하면 당연히 제사를 모셔야했다.
지금도 어머니 제사는 우리가 따로 모시고 있다.
언제나 감사한 인연
시어머니는 수호천사다. 돌아가시고도 우리를 지켜주시는 것 같다.
나 역시 세상에 없는 어머니께 의지할 때가 많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아, 어머니, 어떡해요?’하며 찾았다.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고마운 사람이 바로 시어머니다.
지금도 나를 응원하고 있는 것 같다.
특별한 감정이 있는 것이 아닌데 특별하게 느껴진다.
나도 어머니처럼 며느리에게 잘할 수 있을까 싶다.
아이들도 할머니의 고마움을 안다.
큰 아들이 군대 첫 휴가를 4박5일 나온 다음날
여자 친구하고 가장 먼저 할머니 산소를 다녀올 정도다.
둘째 아들은 스마트폰이 처음 나왔을 때 초기 화면에 할머니 얼굴을 띄워 놓기도 했다.
내가 스마트폰 작동 법을 전혀 몰랐을 때였다.
둘째 방청소를 하다가 방바닥에 놓인 스마트폰을 발로 스쳤는데,
갑자기 스마트폰 화면에 어머니가 빙그레 웃으시며 나타나는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 어떻게 오셨어요? 스마트폰에서 나오신 거예요?”하고 놀래서 물어보았다.
조금 있으니 어머니가 사라지고 다시 화면이 까맣게 변하는 바람에 혼비백산한 적이 있다.
둘째가 할머니를 못 잊고 핸드폰 초기 화면에 설정해놓은 것이었다.
나를 성장시켜준 우리 어머니 감사합니다.
우리 가족 모두에게 한없이 큰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신 어머니께 감사를 드린다.
사랑의 힘은 정말 위대하다. 명절이 되면 할머니 산소 가는 것이 우리 가족의 최우선 순위다.
아이들을 인성이 바르게 잘 키워 주셔서 감사하다.
나 역시 어머니 덕분에 공직생활을 즐겁게 잘 할 수 있었다.
역시 여자를 돕는 사람은 여자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